[한양도성] 개화운동의 상징 '정동'

한양도성 해설기 ㉕ /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 2017.11.18 05:22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서소문로를 건너면 정동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운동의 상징적인 구역이어서 ‘공사관구역’, ‘공사관거리’ 또는 ‘유럽인정착지’ 등으로 불렸다. 1883년 부임한 미국공사 푸트(한국명 복덕·1826~1913)가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씨’ 집을 두채 사들여 공사관을 연 것이 시작이다. 이후 영국공사관을 비롯해 조선과 조약을 맺은 강대국은 정동 안이나 근처에 공사관과 영사관을 지었다.

1884년 이후부터는 서양 민간인도 정동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국의 공사관이나 영사관 주변에 거주지를 잡고 선교 및 교육활동을 펼쳤다. 정동은 곧 외교의 중심가로, 선교활동의 근거지로, 또 신학문의 발상지로 근대문물의 전파지가 됐다.


배재학당 동관.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구부러진 배재학당길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조됐다면 정안빌딩 왼쪽으로 지나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배재학당길’이다. 길 왼쪽으로는 순화빌딩과 평안교회가 보이고 이 두 건물 사이 담장 옆으로 ‘수렛골’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은 차동(車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든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 숙박시설은 소의문과 돈의문 근처에 자리한 것으로 짐작해볼 때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을 확률이 높다.

구부러진 배재학당길은 정동과 순화동의 법정동 경계여서 이 길을 따라 성곽이 지나갔을 것이다. 배재학당길의 종착점은 배재공원이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신식교육의 효시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5년 4월5일 조선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는 그해 8월3일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학당이라는 학교 이름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1886년 6월8일 고종황제가 직접 지었다. 이 날이 현재 배재중·고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배재학당의 역사

배재학당은 한옥 한채를 구입해 벽 두칸을 헐어 교실을 만든 게 시작이다. 하지만 전국의 남학생들이 이 근대식 학교로 몰려들자 아펜젤러는 1887년 8월 한옥교사 대신 양옥교사를 착공,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1층 면적이 330.58㎡인 이 교사는 1932년 대강당을 신축하며 헐렸다.

두번째로 지은 건물이 현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쓰이는 동관이다. 지상 2층 반지하 1층의 붉은벽돌건물로 1914년 5월 착공해 1916년 3월 준공했다. 배재학당 구내에 유일하게 보존된 유서 깊은 이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다. 동관 앞에는 수령 525년이 된 보호수 향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맸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그때 끈을 맨 대못이 지금도 나무 허리에 박혀있다.

세번째로 지은 서관은 1922년 4월 착공해 1923년 3월 준공했다. 건축양식은 동관과 같고 서로 마주 본 쌍둥이건물이다. 이 건물은 배재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겼다.

마지막 건물은 배재학당 구교사를 헐고 지은 대강당이다. 1932년 9월 착공, 1935년 5월 준공한 1322㎡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벽돌건물이었다.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는데 현재 배재빌딩을 지을 때 헐었다. 중요한 사적 하나가 사라져 안타깝다.

배재학당을 회고하면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떠오른다. 그는 아펜젤러가 가장 아끼는 학생 가운데 한명이었다고 한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 망명하고 광복 후 귀국해 한국정치의 중심인물이 된 것도 배재학당에서 맺은 인연이 단초가 되지 않았을까.

배재학교는 1984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사해 지금 그 자리는 ‘배재공원’이라는 시민쉼터가 됐다. 배재학당길은 배재공원에서 끝나는 것 같은데 유심히 살펴보면 러시아대사관의 뒷문까지 연결된다. 러시아대사관 터가 배재학당의 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재공원의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터는 1885년 8월3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설립, 이 땅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요, 신문화의 요람지다. 1895년에는 여기에서 독립협회가 태동했고 독립신문도 발간됐다. 또한 1897년 맨손체조를 비롯해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동과 순화동의 법정동 경계는 이 길의 진행방향과 일치하며 성곽의 진행경로와도 같다. 하지만 대사관구역은 러시아의 치외법권구역이라 들어갈 수 없어서 다음 행선지인 이화여고 노천극장까지 이리저리 돌아가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은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제일교회를 끼고 ‘정동길’로 들어선 후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4호(2017년 11월15~2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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