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서소문과 중림동 약현성당

한양도성 해설기 ㉔ /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 2017.11.04 06:51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면 그 일대가 주위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남산의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은 산자락에 숭례문을 세웠기 때문이다. 목멱산의 산자락은 소의문, 돈의문을 거쳐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인왕산의 줄기는 창의문을 지나 백악산으로 넘어간다.

이 같은 지형 때문에 백악산과 인왕산에서 흘러내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휘어진 것이다. 대신 인왕산에서 용산으로 흐르는 만초천은 남대문 밖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숭례성터길’을 따라가면 대한상공회의소 건물과 퍼시픽타워의 담장이 보이는데 밑바닥에 조금 남은 성곽을 복원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원했다기보다 시늉만 했다는 표현이 맞다. 여장이 없는 데다 3m 정도만 쌓아 단순한 담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옛 것과 요즘 쌓은 것이 극명하게 대조돼 민망함이 앞선다. 그나마 이처럼 어설픈 흔적이 주차타워에 묻혀 다행이다.

대한상공회의소 뒤로 돌아가면 지금 부영 건물(옛 삼성생명 본관) 뒤쪽에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유숙했다는 ‘태평관’(太平館)의 표지판이 있다. ‘태평로’(太平路)라는 도로명은 여기서 유래됐다. 다시 숭례성터길로 나와 직진하면 왕복 4차선 서소문로와 만난다.


소의문 터(소덕문 터).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소의문 터를 찾다

서소문은 ‘소의문’(昭義門)의 속칭이다. 서소문로는 서소문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재 서소문은 찾아볼 수 없다. 도성의 문은 대개 그 부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므로 서소문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소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차도가 생기기 전 능선이었을 텐데 지금의 서소문로 고가도로 시작 지점에 해당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차타워 담장 위에 얹힌 소의문 표지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지만 성곽탐방객들의 불평을 들었는지 담장 밑 보도에 그것을 내려놨다.

표지석에는 “소덕문(昭德門) 터. 서울의 서소문으로 태조 5년(1396)에 세우다. 예종 때 소의문으로 고쳤고 1914년 일제가 철거했다”고 새겨졌다. 하지만 예종 때 그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없다. 엉터리 고증이다.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도록 지시한 기록은 영조 14년(1738)에 처음 나오고 소의문 이름과 문루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영조 20년(1744) 8월4일 기사에 나온다.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문루(門樓)가 없었다. 금위영(禁衛營)에 명해 이를 짓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보고하므로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기사다.

이 기록으로 보아 서소문에는 문루가 없었고 홍예문만 있던 것을 영조 때에 와서 문루를 올리고 이름도 고쳤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고친 시기를 왜 예종 때라고 했을까. 조선의 9대 임금 성종은 즉위 3년차인 1472년 1월11일에 선대 임금 예종(성종의 숙부)의 원비인 장순왕후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이 존호가 소덕문의 이름과 같아 장순왕후의 존호를 더 존중하는 의미로 소의문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에 관한 당시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표지석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이 예종 때라고 한 것은 장순왕후의 남편이 예종이라 한번 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소의문은 인천과 강화방면으로 출입하는 관문이었다. 또한 죽은 백성들의 관을 내보냈던 문이었고 나라의 죄인이 처형을 받으러 끌려나갔던 문이었다. 그러니까 서소문도 광희문과 더불어 시구문(屍柩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894년 12월25일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이 처형된 후 서소문 네거리에서 3일 동안 효수되는 참상도 백성들은 목격했다. 천주교 순교자들은 이 문을 통해 처형장으로 나갔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서소문을 ‘순교자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표지석에 기록된 것처럼 소의문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철거됐다.


상공회의소 뒤편의 성곽.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칠패시장터.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중림동 천주교 약현성당

중림동 천주교 약현성당은 사적 제 252호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서소문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중림동 약현 언덕 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세웠다. 고종 23년(1886) 한불수호조약 체결 후 6년이 지나 고종 29년(1892) 12월2일 완공됐다. 한국 최초의 성당으로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문을 열었다.

이곳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름이었다. 이 고개에 약초가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약초재배지가 그곳에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약초고개였던 것은 틀림없다.

약현성당을 이곳에 세운 것은 한국인 최초로 영세받은 이승훈의 집이 이 근처이고 신유박해(辛酉迫害·1801),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병인박해(丙寅迫害·1866) 등 천주교의 수난 때 44명의 천주교도들이 이 성당 아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 순교자들 중에는 이승훈, 정약종(정약용의 형), 황사영, 남종삼 등이 있다. 로마교황청은 후에 이 순교자들을 한국 103인의 성인에 포함해 시성(諡聖)했다.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된 기념물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2호(2017년 11월1일~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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