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조선 신궁과 남산의 수난사

한양도성 해설기 ⑳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 2017.09.02 06:57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신사(神社)는 일본 신민화정책의 일환이었고 일제는 조선인의 참배를 강요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건립이 전국적으로 행해져 1945년 8월 해방 당시 조선 전역의 신사는 무려 1141개에 달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남산 중턱에 세운 신사는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남기려고 역점을 둔 곳이다. 이곳은 남산의 한양공원, 즉 철거된 남산식물원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을 아우르는 자리다. 부지 확보가 끝나자 1920년 5월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기공식을 갖고 건립을 시작했다. 일본의 성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영산인 남산을 무참히 파괴한 사건이다. 숭례문에서 조선신궁 앞까지 참배로를 내고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허물어 찻길을 냈다. 지금 소월길의 모태다.

시내에서도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모든 승객이 일어나 묵념해야 했다. 신궁 입구에서 정전이 있는 광장까지 오르기 위해 돌계단 384개를 놓았다. 이 계단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나는 2005년 방영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오는 삼순이 계단이고 또 하나는 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옛 어린이회관) 옆에서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다.

옛 어린이회관은 조선신궁 상광장 북쪽 끝에서 중광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산의 수난, 12.8만평 부지에 세워진 ‘신궁’

남산의 신사는 무려 42만2809.917㎡(당시 단위로 약 12만7900평) 규모의 부지에 세워졌다. 일본신사의 건축양식에 따라 신전(神殿)·배전(拜殿)·신고(神庫)·서원문(誓願門)·신찬소(神饌所)·제기고(祭器庫)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했다. 여기에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했다.

1925년 6월27일 준공을 앞두고 신사의 명칭을 ‘신궁’으로 개칭했다. 이는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곳에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함께 조선을 병합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왕의 신위를 안치했다.

제아무리 조선신궁이라 해도 영원할 순 없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튿날 오후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진행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월7일부터 시작한 해체작업은 10월6일까지 이어졌고 당시 신궁에 신물(神物)로 둔 거울만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옮겼다. 다른 곳의 신사는 우리 손으로 파괴했지만 남산 조선신궁은 일본인들 스스로 해체했다.

남산 소나무의 수난사도 왜군의 침략과 궤를 같이한다. 임진왜란 때 예장동 일원에 왜군이 주둔하면서 남산의 소나무를 벌목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신궁과 신사를 지었다. 일제는 그 대신 벚나무를 심었다.

조선 태조 이래 목멱산의 소나무가 무성해야 왕조의 정기가 산다는 이유로 왕들은 남산의 소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애국가의 가사처럼 남산 소나무 숲을 잘 가꾸는 것은 우리 후손의 몫이다.


조선신궁으로 훼손된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터. /사진=뉴시스 DB

◆일본인들이 정착한 남산 주변지역 ‘왜성대’

남산의 수난사를 돌아보며 한·일 양국 간 치욕의 역사를 되새긴다. 분명 남산의 수난은 일본과 관계가 깊다.

조선 초기 남산 동쪽기슭에는 왜의 사신이 유숙하는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지금의 예장동과 회현동 1가에 걸쳐 왜군이 진을 치기도 했다.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서 왜장터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진지가 지금의 정동까지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군사들의 훈련장인 무예장(武藝場)이 있었다. 이를 줄여 예장 또는 예장골이라 불렀고 오늘날 예장동이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이후 1885년 도성 내 일본인의 거주가 허용됨에 따라 일본인들이 남산 주변지역에 정착하면서 왜성대(倭城臺)라고 불렀다.

조일수교(1876) 이후 일본공사관은 서대문 밖 청수장시대와 도성 안 교동시대를 거쳐 1885년 1월12일부터 남산 기슭 왜성대에 공사관을 세웠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6년 2월 공사관이 폐지되고 조선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일본공사관은 통감관저가 됐고 그 부근에 1907년 2월28일 통감부청사를 건립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통감부청사는 총독부청사로 사용되다가 1926년 경복궁 안에 신청사가 완공돼 이전했다.

지금의 서울유스호스텔 자리는 일본 공사관과 통감관저였고 만화의 집, 즉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다. 통감부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통감이 지휘했던 곳이고 1910년 이후에는 총독부로서 총독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통치했던 곳이다. 1926년 총독부와 총독관저가 1926년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남산은 일본식민통치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숭의여대 자리는 경성신사 터였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의 하부조직으로 서울과 경기지역의 대표신사였다.

또 지금의 예장동·주자동·충무로1가를 포함하는 진고개 일원이 일본인 거주지가 됐다. 예장동지역에 왜성대공원이 조성되고 회현동일대에 한양공원이 들어선 것도 그곳이 그들의 집단거주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을 거점으로 일본인 거주지는 숭례문과 회현동 명동 을지로 쪽으로도 확장됐다. 그 이전까지 떵떵거렸던 북촌의 조선인들은 남촌의 화려한 일본인 상가를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3호(2017년 8월30일~9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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