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대출자는 '볼모'가 아니다

성승제 기자 | 2017.08.23 05:56
“낮은 기준금리 장기화는 (우리 경제에) 좋지 않다.”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
“외부에서 금리인하를 요구하는 것은 금리 결정에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한다.”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한국은행 총재는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되는 자리다. 정부는 1998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꾼 이후 지금까지 한은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했다. 실제 98년 이후 한은 총재가 중도사퇴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이성태 전 총재와 김중수 전 총재의 발언처럼 정치적 독립성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전 정권이 선임한 한은 총재와 새정부 간 정책방향이 엇갈리면 정부는 망설임 없이 통화정책에 개입했다.

노무현정부가 선임한 이성태 전 총재는 이명박정부와 금리조정을 두고 적잖은 갈등을 빚었다. 이명박정부가 성장률과 대기업 위주 정책을 펴기 위해 한은에 금리인하를 요구했지만 이 전 총재는 되레 금리를 올리는 강수를 뒀다. 결국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은을 방문해 이 전 총재를 압박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이명박정부가 선임한 김중수 전 총재 역시 금리조정을 두고 박근혜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성태 전 총재는 이명박 대통령과 2년, 김중수 전 총재는 1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임기가 겹쳤다.

이 같은 기류는 문재인정부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준금리가 연 1.25%인 상황은 문제가 있다”고 발언하면서다. 청와대가 14개월간 묶인 기준금리를 인상하라고 한은을 압박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발언 직후 금융시장은 채권금리가 오르는 등 한동안 출렁거렸다. 채권금리가 상승하면 바로미터인 시장금리가 오르고 이와 연동되는 대출금리도 덩달아 높아진다. 결국 그의 말 한마디에 대출자의 이자부담만 가중된 셈이다.

물론 김 경제보좌관의 속내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책 방향에 통화정책도 공조할 필요가 있다. 한은은 한국은행법 제6조 1항에 따라 정부와 협의해 중기 물가안정목표를 설정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고위관료가 한은과 협의 없이 통화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시장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에 따른 피해는 모두 대출자 등 서민에게 전가될 수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현재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은 사람은 1000만명이 넘는다. 자칫 대출이자가 기준금리와 무관하게 들썩인다면 여론도 언제든 현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등을 돌릴 수 있다. 대출자를 볼모로 정부와 한은 간 엇갈린 시그널, 이제 그만 보고 싶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2호(2017년 8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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