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남산 정상에서 내려가다

한양도성 해설기 ⑲ /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 2017.08.19 07:04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남산 정상 부근 성곽은 멸실구간이 많다. 버스정류장 앞 광장에서 끊어진 성곽은 정상 쪽으로 이어지다가 남산타워에서 다시 끊어진다. 이후 팔각정을 둘러 숭례문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이 성곽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온다.

이 볼썽사나운 건물을 뒤로하고 내려가면 잠두(蠶頭)봉이 얌전히 엎드려있다. 봉우리가 누에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곳에 서울도심을 가깝고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남산포토아일랜드’가 있다. 백악산·인왕산·낙산이 지척으로 보이고 남산 동쪽자락 필동에 남산골 한옥마을도 보인다. 남대문로에 한국은행, 남대문시장도 보인다. 경복궁이며 창덕궁이며 덕수궁도 보인다. 한마디로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사진 찍기 좋은 곳’처럼 쉽게 쓰지 않고 굳이 외래어로 지점표시를 했는지 의문이다. 외국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모르지만 유구한 역사가 숨 쉬는 현장에 달갑지 않은 외래어표기는 몹시 거북하다. 민족의 주체성마저 훼손될까 우려된다.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남산골 한옥마을

1998년에 중건한 한옥마을은 서울 각지에 흩어져있던 한옥을 이전한 도시공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헌병대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수도방위사령부 부지였던 이곳을 1989년 서울시가 매입해 공원으로 단장했다.

한옥마을의 전통정원은 그동안 훼손된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해 정자와 연못 등을 지었고 남산의 자연식생인 소나무 등의 수종을 심었다. 계곡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다.

필동에서 들어가는 북동쪽 입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 황후 윤씨 친가, 순정효 황후의 부친인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도편수 이승업 가옥, 오위장(조선시대 최고군령기관인 오위도총부에 속한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김춘영 가옥, 철종의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등 조선후기와 개화기에 건축된 가옥이 모여있다. 5채 모두가 민속자료 한옥이다. 한옥지구 남쪽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 1994년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조선시대 남산의 주거지는 청학동(靑鶴洞)이라고 부를 만큼 경치가 수려했다. 지금의 필동·묵동·예장동 일대다. 일상을 지필묵과 함께하는 선비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그 범위가 점점 넓어져 회현동과 진고개까지를 일컬었다.

조선중기까지는 지금의 가회동·재동·계동·삼청동·사간동 등을 이루는 도성 안의 북촌에 현직 권세가들이 모여 살았다. 인조반정 후로는 주로 서인 계열의 대신들이 많이 살았다. 그중에서도 노론세력이 주축을 이뤘다.


남산 한옥마을. /사진=이미지투데이

◆남산 딸깍발이

남산골에는 과거에 합격했으나 보직을 얻지 못한 생원진사들이 모여 살았다. 또 하급관리와 권좌에서 물러났거나 몰락한 남인계열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남산골 선비들은 학문과 기개는 높았으나 돈벌이가 없었으니 생활이 궁핍했다. 여러번 꿰맨 헌 망건에 좌우가 뒤틀린 헌 갓을 쓰고 옷자락이 해진 꾀죄죄한 도포를 입은 핏기 없는 행색의 선비를 상상해보자.

이 같은 가난한 선비를 일컬어 ‘남산골샌님’이라고 불렀다. 또 비가 오면 나막신을 신고 딸깍거리며 돌아다녀서 ‘남산 딸깍발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진고개(현 명동 일대)라고 부르던 곳은 포장이 되기 전에는 비가 올 때마다 흙이 질퍽해져서 선비들은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남산골샌님은 비록 관직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돈이나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 고지식한 선비들을 일컫는 용어로 발전했다. 나아가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선비들을 지칭하는 말이 됐고 요즘의 시민단체나 재야세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청렴과 예의, 염치와 의리를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자존심과 지조가 그들의 생활신조였다. 글만 읽는 딸깍발이가 무능한 생활인이었을지라도 대의에는 강직하고 불의를 멀리했던 그들의 정신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급급한 현대인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까.

세월이 바뀌어 일제강점기에는 남촌의 시대가 됐고 북촌은 몰락했다. 북촌사람들은 화려한 남촌을 부러워했다. 세월의 무상함은 거기서도 느낄 수 있다.

포토아일랜드를 뒤로하고 계단 길을 내려오면 성곽이 왼쪽으로 급격하게 꺾이는 지점이 나온다. 그곳에서 성곽과 길은 멀어진다. 구불구불 도는 길은 중간에 성곽과 잠시 만났다가 계단이 끝나기 전에 다시 이별한다. 일제가 그곳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성곽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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