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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70] 은행나무는 알고 있다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2019.11.20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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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의 연산군. /사진=뉴시스 DB



서울 방학동에 가면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이가 550살이라고도 하고 830살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나이는 식물학자에게 맡겨둔다 해도 조선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봤다는 것은 사실일 듯하다.

그래서일까 이 은행나무 바로 앞에는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릉이 있다. 그 건너편에는 정의공주 묘가 자리한다.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 훈민정음 창제 때 큰 역할을 했던 분이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이고, 정의공주는 그의 증고모할머니다. 교동도에서 훙서(薨逝)한 그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의외다.

◆연산군 “백성이 배(임금)를 엎을 수 있다”는 것 망각

연산군은 세조의 손자인 성종의 맏아들이다. 그는 조선의 왕 가운데 궁궐에서 태어난 첫 적장자다. 왕위에 오를 때 앞선 어느 왕보다 뚜렷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 교동도로 귀양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사약을 받았다고도 하고 울화병이 원인이라고도 전해진다. 폐위됐기에 그의 묘는 릉으로 불리지 못했다. 묘호와 시호도 없고 종묘에도 모셔지지 않았다. 엄청난 인생유전의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즉위 초에 <속국조보감>을 완성시켰고 왜구를 격퇴했으며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했다. 그 덕분에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하늘의 큰 뜻을 받들어 문을 날줄로 무를 씨줄로 삼는 대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이 존호를 물리치기도 했다. 적어도 4년, 길게 잡으면 10년 동안 성종 때의 느슨했던 분위기를 다잡으며 왕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12년(1494~1506)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다. 즉위한 지 1년 뒤에 그의 생모인 윤비가 폐비된 사건을 알게 되고 이를 기화로 복수의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윤비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과 김굉필 등 수십명을 살해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열어 시신을 벰)했다. 당시 그가 남긴 한시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昨趨思廟拜慈親(작추사묘배자친)

奠爵難收淚滿茵(전작난수루만인)

懇迫情懷難紀極(간박정회난기극)

英靈應有顧誠眞(영령응유고성진)

어제 묘에 나아가 어머니 생각하며 절하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아보시리라 <所懷, 소회>

연산군은 지나쳤다. 생모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핑계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대간(간언하는 신하)을 무력화시켰다. 그 뒤 갑자사화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왕의 권력을 절대화시켰다. 그리고 멈추지를 못했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이 새로 만들어질 정도로 낭비가 심했다. 성적으로도 문란한 것으로 <연산군일기>는 전한다.

학정(虐政)이 계속 이어지자 성희안, 박원종, 유자광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고 왕의 동생을 새로운 왕(중종)으로 추대했다. 연산군의 증조부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됐던 비극이 되풀이됐다. 연산군은 “왕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 놓기도 한다”는 ‘재주복주’(載舟覆舟)의 이치를 잊어 왕위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공자가 소정묘를 주살한 까닭

공자는 노나라 사구(司寇, 법무부장관)가 된 지 7일째 되는 날 명망이 높았던 대부 소정묘(少正卯, ?~BC496)를 주살(誅殺)했다. 또 그 시신을 3일간 궁정에 내건 것으로 전해진다. 안회를 제외하곤 공자의 수제자 격이었던 자공(子貢)이 제자들을 대표해 소정묘를 죽인 이유를 공자에게 따졌다. 당시 자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소정묘를 인망이 높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양계초는 이 사건을 공자의 일대오점이지만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평했다. 인(仁, 보편적 사랑)을 강조한 공자가 죄 없는 소정묘를 죽인 것은 사실일 리 없으며 사실이라면 잘못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정권이 1960년대 비공비림(批孔批林, 공자와 임표를 비판함)운동 때 신흥세력인 소정묘를 죽인 것은 공자가 보수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공까지 나서 소정묘를 거들 정도로 오해를 받자 공자는 소정묘를 죽인 이유에 대해 다섯가지로 길게 설명했다. “사람에게 악한 것이 다섯가지 있는데 도둑질은 그 가운데 끼지 않는다. 첫째 마음이 만사에 통달하면서도 음험한 것. 둘째 행실이 편벽되면서도 완고한 것. 셋째 거짓말을 일삼으면서도 말을 잘하는 것. 넷째 아는 것이 추잡하면서도 광범한 것. 다섯째 그릇된 일을 일삼으면서도 겉으로는 윤택해 보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다섯가지 가운데 하나만 갖고 있더라도 군자는 처형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소정묘는 그런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사는 곳에는 따르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고 그의 말은 사악함을 꾸며 여러 사람의 눈을 속일 수가 있었으며 그의 실력은 올바른 사람들을 반대하면서 홀로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이런 자는 소인들의 걸웅이라고 할 수 있으니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공자는 악이 너무 퍼져 다스리기 어려워지기 전에, 악의 싹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처리하는 불현시도(不見是圖)로 사전에 예방한 것이다.

◆권력은 짧고 은행나무는 길다

연산군이 민심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조선 왕 가운데 최악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모의 원한을 풀어주는 선에서 끝내고 덕치(德治)를 폈다면 천수를 누리고 조선 왕조는 보다 더 건전하게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출 줄 몰랐다.

공자가 소정묘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신흥 지주계급을 대표해 노나라를 개혁하는 데 큰 공을 세웠을까. 공자의 염려대로 대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백성과 노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렸을까. 길어야 100년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판단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하지만 천살을 앞두고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답을 알 것이다. 사람의 삶과 권력은 짧아도 은행나무는 길고 역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9호(2019년 11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머니S> 산업1팀 IT담당 박흥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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