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이건희칼럼] 권력 좇는 시대, 떠오르는 ‘서화담’

이건희 재테크 칼럼니스트2019.03.21 07:01

기대했던 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많은 사람이 아쉬워했다. 훗날 북한에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하게 된다면 필자가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개성이다. 부모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불과 53.7㎞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북한의 도시 중 서울에서 가장 가깝다. 부모님은 6·25 전쟁 중 피란 내려온 후 평택보다 가까운 고향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참으로 ‘가깝고도 먼 고향’이다. 필자라도 부모님을 대신해 가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부모님 생전에 개성에 관한 얘기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서울 사람과 언쟁을 하며 서로 자기네 사는 곳에 ‘남대문’이 있다고 주장해 내기를 했는데 확인해 보니 개성에 있는 문에는 ‘남대문’(南大門)이라 적힌 현판이 붙어 있고 서울에 있는 문의 현판에는 ‘숭례문’(崇禮門)이라 쓰여 있어서 개성 사람이 이겼다고 한다. 개성의 남대문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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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로 불리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 옥계폭포. /사진제공=영동군청

◆통일 후에도 못 보는 송도의 이절

개성(송도)에서 가장 빼어난 것 세가지로 알려진 ‘송도삼절’(松都三絶) 중 박연폭포 얘기도 들었다.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를 흐르는 여러 골짜기 물이 내려오면서 합쳐진 못이 박연(朴淵)이고 여기에서 37m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물이 박연폭포다.

폭포 이름에는 슬픈 전설이 담겨 있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폭포에 놀러와 피리를 부는데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폭포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알고 비탄에 빠져 폭포 아래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박연폭포 명승지 구역은 상당히 넓어서 범사정, 대흥산성 및 성의 북문, 관음사, 대흥사, 3개의 담소(기담·마담·구담), 마담폭포, 대흥폭포, 계절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고 한다. 송도삼절 중 박연폭포는 볼 수 있을지언정 나머지 둘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죽은 지 450년이 넘은 황진이와 서경덕이니까. 박연폭포 용바위에다 황진이가 이백의 시를 머리카락으로 새겼다는 초서체 글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고고한 인품은 시대가 변해도 존경

화담 서경덕은 530년 전 이맘때쯤, 즉 1489년 3월18일(음력 2월17일) 송도에서 태어났다. 높은 학식과 덕망을 널리 인정받아 관직에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음에도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정진하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기에 고위 관직 한자리 얻으려고 안달하는 이 시대에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다.

화담(花潭)이란 호는 계곡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못을 이루는 곳에 진달래꽃이 비치는 것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제자 초당 허엽은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는 화담선생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곤 하셨다”고 했다. 평생을 은둔생활한 사람 중에서 서경덕만큼 후대까지 널리 회자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후 명종 때 호조좌랑에 추증됐으며 선조 때는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문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퇴계 이황은 “살아생전 그를 만났더라면 10년 책 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후 200년도 넘은 후의 인물인 정조대왕은 서경덕을 중국 북송 때 대사상가인 소강절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극찬했다.

관직을 멀리하고 살았지만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 중에는 명신으로 이름을 날리고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 많다. 영의정에 오른 박순, 우의정을 역임한 남봉, 사간원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홍길동을 쓴 허균의 아버지),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홍성민,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 등이 그의 제자다.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는 정계와 학계에 두루 포진한 그의 제자들이 하나의 학풍을 형성해 조선 유학사 최초의 학파라 할 수 있는 화담학파를 이뤘다고 평했다.

◆흙속의 진주도 빛을 잃지 않아

명문가나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야 풍부한 학식을 쌓을 수 있어 출세하기 유리한 조건인 건 지금만이 아니라 옛날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서경덕은 어린 나이에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흙수저 출신이다. 가계가 빈곤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스승 없이 거의 혼자 공부해야 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나물 뜯으러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서도 바구니를 채우지 못해 부모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물 캘 때 새가 있기에 새를 관찰하고 새가 점차 능숙하게 날아가는 과정을 살피다가 그랬다고 답했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며 탄식했다. 때로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독서를 하다가 과로로 몸이 상했다. 어쩔 수 없이 21세에 학업을 포기하고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한 뒤 개성에 돌아와 다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31세 때는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을 주도하던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됐으나 사양하고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화담에 서재를 짓고 교육과 연구에만 전념했다. (조광조 시대가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의 실패를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끼닛거리가 부족해 굶주려도 태연자약했으며 제자들 학문이 진취된 것을 보며 매우 기뻐했다. 43세 되던 해에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해 장원급제했으나 대과와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만 더욱 몰두했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세인이 감복했다고 한다. 56세에는 후릉참봉에 임명됐음에도 한사코 부임하지 않아 해임됐다. 58세에 죽음을 예감하고 만물의 구성과 생성원리를 밝힌 <태허설(太虛說)>과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남겼다. 임종 전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는 잠시 후 “생사의 이치를 오래 전 알았기에 마음이 편안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태허설>에서 “태허가 움직여 양을 낳고 조용히 해 음을 낳음으로써 태허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둘을 포함한다. 기가 모여 두텁게 쌓인 것이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고 했다.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해 우주와 인간 및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독창적 이론을 정립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기(氣)를 중시하는 정통 성리학의 이기이원론과 달랐다. 태허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닌 기의 본체이고 우주공간에는 기가 충만해 있으며 양기와 음기가 이(理)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화담 이론은 그가 죽고 수백년 뒤 나온 빅뱅 이론, 일반상대성 이론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우주만물이 과학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현대물리학을 떠오르게 해 놀랍다.

학문적으로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이이(이율곡)는 서경덕이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침에 도달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최대의 총서로 꼽히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중국인이 아닌 인물로는 유일하게 서경덕의 학문이 실렸다.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만 몰두

송도삼절의 두 인물 황진이와 서경덕이 교유한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여러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 다뤄졌다. 절세미인에 가야금에 능통하고 뛰어난 문예까지 겸비한 기생 황진이는 선비들 마음을 사로잡은 최고의 로망이었지만 그녀의 손목 한번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황진이가 굳은 절조를 지닌 벽계수를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시조를 읊으며 무너뜨렸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30년간 수도를 하여 생불(生佛)로 존경받던 스님 지족선사마저도 파계승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여색을 멀리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서경덕만큼은 온갖 수단방법으로 유혹했지만 소용없었다. 인품에 감격해 그를 스승으로 여기고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황진이는 일부러 비를 맡은 채 서경덕을 찾아갔다. 물에 젖은 하얀 속옷이 알몸에 밀착돼 요염한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서경덕은 혼자 글을 읽고 있는 집에 찾아온 황진이를 맞아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 줬다. 물기를 닦아낸 후 마른 이부자리를 펴 몸을 말리라고 하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 읽기를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져 깊은 밤이 되자 방이 하나이기 때문에 황진이 옆에 서경덕이 누웠다. ‘그래도 저도 사내인 것을…’ 기대를 역시 무참히 깨면서 서경덕은 잠만 잤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서경덕은 19세에 태안이씨와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손자도 여러명 봤다.)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뜬 것은 서경덕이 밥을 차려 놓은 뒤였다.

며칠 후 황진이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해 다시 찾아갔다.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역시 반갑게 맞았고 황진이는 큰절 올리며 제자로 삼아 달라는 뜻을 밝혔다. 스캔들 많은 황진이를 받아들이는 데 서경덕의 제자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기꺼이 거두어들인 것은 차별 없는 인간애와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야사에조차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으며 둘의 관계에는 오직 흠모와 존경만 배어 있다.

동시대에 여러 인물이 현실정치에 진출해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을 서경덕은 모두 공리공담으로 보고 수신과 제가, 학문연구에만 전념했다.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 속에 은거해 살았기에 방관자로 보일 수 있지만 잘못된 정치를 알게 될 때에는 개탄하며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능력과 전문성이 부족하면서도 권력자 성향에 맞춰 가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또한 그가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학문을 꾸준히 닦으며 인재들을 길러낸 뛰어난 스승이었다는 점은 학계에서 정계로 진출하려는 이가 많은 이 시대에 되새겨볼 부분이다.

존재에 대하여 (서경덕 1489~1546)

존재가 나고 또 나도 다함이 없어
다하였나 싶은 때에 어디선가 또 나오네.
시작도 없이 나고 또 나거늘
그대는 아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존재가 가고 또 가도 다함이 없어
다하였나 싶은 때에도 다 간 적이 없어라.
끝도 없이 가고 또 가거늘
그대는 아는가, 어디로 가는지를?

☞ 본 기사는 <머니S> 제584호(2019년 3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건희 재테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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